어린이가 없는 집의 어린이 날은 완벽한 휴일이다.
오늘은 복잡한 곳을 피해 얼마전 조성을 마쳤다는 대덕구 송촌동(회덕)의 동춘당을 찾기로 했다.
대전 대덕구의 원래 이름은 회덕(懷德). ‘덕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 (대인회덕 소인회토; 大人懷德 小人懷土)란 공자의 논어에서 따왔다. 현재의 대덕은 일제강점기 1935년, 대전과 회덕을 병합하면서 한 자씩 따 붙인 지명이다. 원래 송준길이 태어난 곳은 서울 정동이다. (송준길이 태어난 집은 뒷날 선생의 스승이 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송준길의 어머니는 사계 선생의 아버지 김계휘의 사촌인 광주 목사 김은휘의 딸로 친정에 가서 몸을 풀었던 것. 이후 세살 때 회덕으로 옴)
이곳을 찾은 특별한 이유는 율곡 이이선생으로부터 사계 김장생, 김집의 제자이며 기호학파의 거두였던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의 생애를 엿보고 싶은 마음이 큰 탓이었다.
동춘당을 찾아가는 길목에 우연히 마주친 송애당은 조선 인조 때 김경여(1597∼1653)가 지은 별당건물로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600년 동안 은진송씨의 구심점이 된 대종가로서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송씨 종가의 별당 쌍청당이다.
쌍청당은 고려 말 조선 초, 부사정을 지낸 송유의 별당으로 평소 송유와 교분이 두터웠던 박팽년이 지어준 당호인데,
아파트 숲 앞에 조성된 동춘당공원은 송촌택지개발사업 시 동춘당 일대를 공원화(약 1만 7천평)하여 만들어진
명품 공원으로 작년에 완공되어 시민들의 여유로운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은진 송씨의 상징성은 지명에 반영됐다. 송준길의 종가가 있는 곳은 행정지명도 송촌동이요, 주변아파트 단지도 ‘선비 마을’이다.
법동과 송촌동을 잇는 ‘동춘당로’가 생겼고, 송준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동춘당 생애길’도 조성됐다. 두 길은 ‘동춘당’에서 교차한다.
동춘당은 대전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옛 건축물이다. 송준길의 호 동춘은 별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택은 그 전에 건립되었으나, 별당인 동춘당은 1643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해 정침 앞쪽에 지었다.
동춘당은 조선시대 별당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단아하면서도 간소한 건물로
검소한 생활을 통해 유학적 덕목을 지키려는 선비의 의지를 보여준다. 동춘당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고 한다.
동춘당(보물 제 209호)은 동춘의 부친인 송이창이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으로 동춘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금새 친해진 멋쟁이 문화해설사와 정담도 나누고
동춘당 뒷담장으로 들여다 본 고택의 왼편에 위치한 가묘(家廟)와 별묘(別廟). 동춘의 국불천위(國不遷位)가 별묘(別廟)에 따로 모셔져 있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종가 등이 있다.
소박한 모습의 송준길 고택의 사랑채. 뒷편에는 안채가 있지만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라 예의상 가까이 가지 않았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고택엔 예학(禮學)의 깊이와 여러 문인의 시향이 감돈다.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백숙 등을 파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가묘(家廟)와 별묘(別廟)는 모두 앞면 3칸, 옆면 2칸의 홑처마의 맞배집 형식이다
동춘당 집안에는 두 명의 여성이 유명하다. 하나는 동춘의 외손녀 인현왕후이고, 하나는 호연재 김씨(浩然齋; 1681~1722)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동춘의 둘째 사위다. 명성황후가 존경했던 인물도 동춘이었다.
동춘의 차녀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생모이며,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호연재는 동춘의 증손자 송요화의 부인이다. 당시 허난설헌을 비롯한 몇 안 되는 사대부 출신 여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생 출신들이 여류문학의 한 주류를 이뤘던 당대를 비추어볼 때 보석 같은 인물이다.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의 관계
동춘과 우암은 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먼 숙질간이자 두 사람의 할머니 또한 자매간이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우암이 어린 시절 동춘당의 집에 와서 공부하기도 했다. 한 살 위인 동춘에게 우암은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동춘이 어려서부터 우암과 동문수학하며 사계 김장생 (1548~1631)의 예학(禮學)을 계승하게 됐다. 하지만 둘의 성격만은 너무나도 달랐다. 동춘당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양보가 없었고, 우암은 의(義)를 벗어나는 문제를 참지 못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인물이다. 무려 3,000번이나 거론된다고 한다. 조선 후기 모든 논쟁의 진원지였으며 사후에도 공과(攻過)가 거론될 만큼 화약고였다.
그에 반해, 동춘은 온화한 성격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예학을 아우른 인물이다. 아호인 동춘(同春堂) 그대로 항상 봄바람같이, 늘 상대를 따뜻하게 배려했다. 평생 자기중심을 지키고 산분이었다. 생전에 동춘은 대사헌을 스물여섯 차례, 참찬을 열두 차례, 이조판서를 세 차례 제수 받았다.
우암과 두 사람은 마치 한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처럼 나란히 세상의 물길을 헤쳐 갔다. 후대의 역사와 학문세계에서조차 두 사람은 흔히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한 사람처럼 바라보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양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