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위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들렀다가 근처에 있는 수목원을 찾았다.

         천상의 화원을 바라보듯 어머니는 넓고 푸른 수목원에 금새 마음을 뺏기신다.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화단의 꽃을 꺾고 싶어 안달이 나신다. 안된다고 일러 드렸건만 어느새 야생화 한송이를 꺾어 들고 만족해 하신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멋쟁이 할머니로 통했는데 어느새 90을 앞둔 바싹 마른 상할머니가 되고 말았으니 .... 세월의 힘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번씩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물으시는 것은 아마도 생의 남아 있는 날들을 애타게 세고 계신듯 하다.

         차라리 날짜를 잊고 사시면 마음 편하시련만..... 

 

 

 

 

 

 

 

 

 

 

 

 

 

 

 

 

 



 

 

 

 

 

 

 

 

 

 

 

 

 

 

 

오늘은 완주 천등산 맑은 내 옆에 집을 짓고 자연과 벗을 삼아 예술 생활을 하고 있는 노부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나는 몇년 전 다녀온 곳이지만 아내에게 두 분을 꼭 소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문난 길치가 몇년 전의 기억만으로 장소를 잘 찾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예년과 다른 코스로 길을 들어서인지 방향이 오락가락한다.  

요행히 두 부부를 잘 안다는 어느 유원지 주인은 무슨 심사였는지 목적지와는 정반대 방향을 알려 주었다.(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모르는 오지길을 수십분 헤메이다 급기야 막다른 비포장 공사판으로 들어가고  울퉁불퉁 튀어 나온 돌부리들은 유원지 아저씨의 심보처럼 사정없이 차바닥을 긁어댄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 찾기를 포기하고 물가에 내려가 사진이나 몇 방 찍 돌아설 수 밖에.....ㅠㅠ 

이 모든게 백숙 한그릇 안 시킨 죄인 듯 하다. 

 

 

 

 

대둔산을 지나 완주방면으로 가면 천등산이 나오고 그 뒷쪽 어딘가에 예술인 부부가 살고 있다.

 

 

 

 

 남쪽에서 바라 본 천등산. 근처의 대둔산에 밀려 빛을 못본 산이지만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암벽등반가들에게는 훈련 장소로 각광을 받는단다.

 

 

 

천등산을 배경삼아 

 

 

 

 

 

 

 

 

피서객 몇명이 병풍바위 아래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다.

 

 

 

 

 

결국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2011년 6월에 담은 박삼봉, 조예숙 부부의 예술 정

 

 

 

 

 

 

 

 

 

 

 

 

 

 

 

 

 

 

 

 

집에 돌아와 인터넷 지도 검색을 해 보니 이곳은 원고당리길 솔개바위라는 표지가 있는

다리를 건너 좌측 80m 지점에 있었다.

 

 

 

 

돌아 오는 길에 들른 천등산 아래 괴목동천.  흔히들 산세가 수려한 이곳을 운주계곡이라 부른다.

 

 

 

 

 

 

 

 

 

 

 

 

 

 

 

 

 

 

 

 

 

   이곳을 처음 찾은지 벌써 5년쯤 흐른 것 같다.  계백장군의 충정어린 호국정신을 기리는 계백장군유적지는 계백이 백제와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바로 그 황산벌 위에 지어졌다. 망국의 서러움인가! 그동안 백제의 역사는 변변한 유적지도 갖추지 못한 채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아직도 이곳 주변에는 복원되지 못한 백제 산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큰 비가 온 뒤에는 인근 가야곡 냇가에서 돌화살촉이 종종 발견된다고 하니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660년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의 5만여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 : 지금의 대전 동쪽 마도령으로 추측됨)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 오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황산벌(黃山 : 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에 나가 용감히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결국 최후를 맞이 했다는 역사 스토리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일 것 같아 생략한다.

 

  다행히도 서거정(徐居正) 등과 같은 조선조의 유학자들에 의헤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되면서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고, 그 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제군사박물관

 

 

 

 

 

 

 

 

 

 

 

 

박물관 뒷편 야산에는 우람한 탱크가 앙증맞은 꽃에 앞이 막혀 꼼짝을 못하고 있다.

 

 

 

 

이곳은 가짜 말을 타는 놀이시설이지만 뒷쪽으로 가면 실제 말을 탈 수 있는 체험장도 있다.

 

 

 

 

계백장군의 기마상이 있는 충혼동산 쪽에서 바라 본 백제군사박물관 전경

 

 

 

 

 

 

 

 

멀지 않은 곳에 탑정호가 보이고

 

 

 

 

영화세트장으로 만들어진 목조성곽의 모습. 평야지대에 이런 성을 짓고 싸우기에는 너무 허술해 보인다.

실제로는 주변의 수 많은 산성이 연합하여 나당연합군을 곤경에 빠뜨린 것으로 사료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계백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 놓은 사당인 충장사와 주변 경관, 사당은 보수공사 중이다.

 

 

 

 

계백장군의 묘

 

 

 

 

 

 

 

 

공원 아래 주차장 쪽에 조성된 습지생태공원

 

 

 

 

 

 

 

 

 

 

 

 

바람불어 좋은 곳

 

 

 

 

탑정호 주변을 한바퀴 돌며 ....   시원한 호수바람이 더위를 잊게 한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낚시꾼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얼마전 오랜 공사끝에 새로 단장된 탑정댐의 전경.

충남에서 두번째로 큰 저수지로 평지형라서 저수량은 면적에 비해 많지 않으나 농업용수와 식수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수문이 제법 규모있는 댐처럼 근사한 모습이다.

 

 

 

 

수위가 낮아져서인지 수문쪽에 큰 웅덩이가 생겨났다.

 

 

 

 

 

 

 

 

 

 

 

 

 

 

 

 

샤프란!  하늘을 향하다.

 

 

 

 

평지에선 하늘을 배경 삼아 거닐 수 있는 곳이 흔치 않다. 

 

 

 

 

 

가깝다고 해서 꼭 익숙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등잔 밑에 소홀한 인간형인지라 늘 먼 곳만 바라보고 살고 있었지만 이젠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가 되었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능선이 아름다운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을 찾기로 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구름이 하늘의 대부분을 덮어준 덕에 땡볕을 피할 수 있었고 인적도 드물어 느릿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밀착 금지

 

 

 

솔향 그윽한 고도의 숲속

 

 

 

잠시 휴식

 

 

 

 모델처럼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은 역시 젊음이다.

 

 

 

 

 

 

 

연꽃단지로 가는 길목엔 일렬로 늘어선 바람개비가 사람을 반긴다.

 

 

 

 

 

 

 

 

 

 

무령왕릉을 빠져나와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천주교 순교성지인 황새바위성지를 찾았다.

 

 

나즈막한 언덕부지인 황새바위순교유적지는 1978년 지역민들의 구전을 전해듣고 대전교구와 이곳 교동본당 신부님 등이 성역화를 추진하여 1985년 완공하였다. 

 

 

 

성지가 몽마르뜨언덕을 닮아서 지은 듯한 카페 '몽마르뜨'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박찬호선수의 모교인 공주중학교가 바로 아래에 있다.

 

 

 

입구의 모습은 순교자들이 목에 둘렀음직한 형틀처럼 보인다.

과연 우리는 신앙이나 신념을 위해 내놓을 목은 있는가?

 

 

 

 

 

 

 

이곳 황새바위순교지는 신유박해 때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1801년 최초로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이후에도 공주지역의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248명의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무덤경당. 오른쪽 돌기둥은 12사도를 상징한다.

 

 

 

 

마라아도 십자가의 길을 돌며 순교자의 넋을 기린다.

 

 

 

 

1985년 무덤경당과 함께 완공된 순교탑

 

 

구름이 짙게 낀 토요일 오후. 바람 좀 쐬고 싶다는 딸내미의 성화에 인근 대청호반을 한바퀴 돌았다.

호숫가 풍경은 늘 비슷하지만 두 샤프란과 함께 한 나들이길은 유쾌했다. 

 

 

 

 

 

 

온갖 꽃들로 정원을 꾸며놓은 마로니아카페에서 

 

 

 

 

 

 

 

 

 

대청호 자연생태공원

 

 

 

 

 

 

 

 

 

 

 

 

장난기가 발동한 딸내미가 요상한 포즈를 취하며

 

 

 

 

 

 

 

 

 

 

허기를 달래려 들른 대청댐 근처 카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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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샤프란의 생일.

 드라이브를 겸해 1년에 한번 정도 들르는 숲속의 레스토랑 '말메종'을 찾았다.

마침 아내가 좋아하는 부슬비까지 내려주니 분위기는 그만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는 내내 비를 맞는 수목들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손님맞이를 한다.

 축하해요! 사랑해요!

 

 

 

 

 

 

 

 

사람마저 파랗게 물들일 것 같은 정원

 

 

 

영국장미를 알아봐 주자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다며 주인마담이 오히려 고마워 한다.

 

 

 

 

 

 

음식은 벌써부터 먹음직스럽게 나왔는데...  

샤프란은 마담이 만든 수제옷을 구경하며 좀처럼 안하던 수다를 피우다 뒤늦게 돌아온다.

생일 축하하고, 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삽시다.

 

 

 

 

정감이 넘치는 야외 정원

 

 

 

숲속의 새집처럼 사람이 살 집도 작지만 편한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기왕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꽃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고,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

 

 

 

집에 도착하니 얼마 전 방학을 맞아 귀국한 DB군과 왕눈이가 생일축하 꽃다발을 보내 왔다..!  

 

 

 

      

 

        최근들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낚시에 취미가 붙은 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이라는 느낌이 든다.

          타인에게 신경쓸 일도 없고 눈앞의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니  세상의 시름을 잊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늘 친구같고 연인같은 아내가 따라 나서준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어느덧 아내도 세월을 낚는 낚시꾼이 되어가고 있다.

 

 

 

 

 

옥천에 있는 풍치좋은 모 저수지. 한낮에 가랑비까지 내리니 더욱 운치가 있다.

 

 

낚시터와 샤프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지만, 묵직한 붕어의 손맛을 보면 조사가 따로 없다. 

 

 

 

 

 

자연을 벗할 때 가끔은 이런 행운도 낚는다.  35cm 월척붕어

 

 

 

어린이가 없는 집의 어린이 날은 완벽한 휴일이다.

오늘은 복잡한 곳을 피해 얼마전 조성을 마쳤다는 대덕구 송촌동(회덕)의 동춘당을 찾기로 했다.

대전 대덕구의 원래 이름은 회덕(懷德). ‘덕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 (대인회덕 소인회토; 大人懷德 小人懷土)란 공자의 논어에서 따왔다. 현재의 대덕은 일제강점기 1935년, 대전과 회덕을 병합하면서 한 자씩 따 붙인 지명이다. 원래 송준길이 태어난 곳은 서울 정동이다. (송준길이 태어난 집은 뒷날 선생의 스승이 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송준길의 어머니는 사계 선생의 아버지 김계휘의 사촌인 광주 목사 김은휘의 딸로 친정에 가서 몸을 풀었던 것. 이후 세살 때 회덕으로 옴)

 

이곳을 찾은 특별한 이유는 율곡 이이선생으로부터 사계 김장생, 김집의 제자이며 기호학파의 거두였던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의 생애를 엿보고 싶은 마음이 큰 탓이었다.

 

 

  동춘당을 찾아가는 길목에 우연히 마주친 송애당은 조선 인조 때 김경여(1597∼1653)가 지은 별당건물로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600년 동안 은진송씨의 구심점이 된 대종가로서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송씨 종가의 별당 쌍청당이다.

쌍청당은 고려 말 조선 초, 부사정을 지낸 송유의 별당으로 평소 송유와 교분이 두터웠던 박팽년이 지어준 당호인데,

청풍과 명월의 기상을 가슴에 새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다.

 

 

아파트 숲 앞에 조성된 동춘당공원은 송촌택지개발사업 시 동춘당 일대를 공원화(약 1만 7천평)하여 만들어진

명품 공원으로 작년에 완공되어 시민들의 여유로운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은진 송씨의 상징성은 지명에 반영됐다. 송준길의 종가가 있는 곳은 행정지명도 송촌동이요, 주변아파트 단지도 ‘선비 마을’이다.

법동과 송촌동을 잇는 ‘동춘당로’가 생겼고, 송준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동춘당 생애길’도 조성됐다. 두 길은 ‘동춘당’에서 교차한다.

 

 

 

 

 

 

 

 

 

 

 

동춘당은 대전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옛 건축물이다. 송준길의 호 동춘은 별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택은 그 전에 건립되었으나, 별당인 동춘당은 1643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해 정침 앞쪽에 지었다. 
동춘당은 조선시대 별당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단아하면서도 간소한 건물로

검소한 생활을 통해 유학적 덕목을 지키려는 선비의 의지를 보여준다. 동춘당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고 한다.


 

동춘당(보물 제 209호)은 동춘의 부친인 송이창이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으로 동춘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금새 친해진 멋쟁이 문화해설사와 정담도 나누고 

 

 

      동춘당 뒷담장으로 들여다 본 고택의 왼편에 위치한 가묘(家廟)와 별묘(別廟).  동춘의 국불천위(國不遷位)가 별묘(別廟)에 따로 모셔져 있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종가 등이 있다.

 

 

 

 

소박한 모습의 송준길 고택의 사랑채. 뒷편에는 안채가 있지만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라 예의상 가까이 가지 않았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고택엔 예학(禮學)의 깊이와 여러 문인의 시향이 감돈다.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백숙 등을 파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가묘(家廟)와 별묘(別廟)는 모두 앞면 3칸, 옆면 2칸의 홑처마의 맞배집 형식이다

 



동춘당 집안에는 두 명의 여성이 유명하다. 하나는 동춘의 외손녀 인현왕후이고, 하나는 호연재 김씨(浩然齋; 1681~1722)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동춘의 둘째 사위다. 명성황후가 존경했던 인물도 동춘이었다.

동춘의 차녀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생모이며,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호연재는 동춘의 증손자 송요화의 부인이다. 당시 허난설헌을 비롯한 몇 안 되는 사대부 출신 여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생 출신들이 여류문학의 한 주류를 이뤘던 당대를 비추어볼 때 보석 같은 인물이다.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의 관계

 

동춘과 우암은 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먼 숙질간이자 두 사람의 할머니 또한 자매간이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우암이 어린 시절 동춘당의 집에 와서 공부하기도 했다. 한 살 위인 동춘에게 우암은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동춘이 어려서부터 우암과 동문수학하며 사계 김장생 (1548~1631)의 예학(禮學)을 계승하게 됐다. 하지만 둘의 성격만은 너무나도 달랐다. 동춘당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양보가 없었고, 우암은 의(義)를 벗어나는 문제를 참지 못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인물이다. 무려 3,000번이나 거론된다고 한다. 조선 후기 모든 논쟁의 진원지였으며 사후에도 공과(攻過)가 거론될 만큼 화약고였다.
그에 반해, 동춘은 온화한 성격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예학을 아우른 인물이다. 아호인 동춘(同春堂) 그대로 항상 봄바람같이, 늘 상대를 따뜻하게 배려했다. 평생 자기중심을 지키고 산분이었다. 생전에 동춘은 대사헌을 스물여섯 차례, 참찬을 열두 차례, 이조판서를 세 차례 제수 받았다.
우암과 두 사람은 마치 한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처럼 나란히 세상의 물길을 헤쳐 갔다. 후대의 역사와 학문세계에서조차 두 사람은 흔히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한 사람처럼 바라보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양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화창한 일요일이다.  

             종종 사진담기에 몰두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눈 앞에 모든 것들을 화각으로만 바라 보게 된다.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이 반감되기도 한다.

             오늘은 감성여행이라 제목 붙이고, 자유롭게 힐링하고 싶다.

             사진은 최대한 줄이고... 나머지는 기억으로 담는다.

 

 

 

 

 

 

 

 

 

 

 

 

 

 

 

 

 

 

 

 

 

 

 

 

 

 

 

 

 

 

 

 

 

 

 

 

 

 

 

 

 

 

 

 

 

 

          서울에 남아 있는 일과 비자 갱신 관계로 잠시 귀국한 큰아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빠가 보고 싶다며 집에 내려 왔다.

          장시간 비행기를 탄데다가 시차 적응도 안되어 무척 피곤할텐데.... 딸아이를 보는 순간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렇게 먹고 싶었다던 우렁쌈빱으로 급히 배를 불리고, 어둠이 내리는 공원길을 산책했다.

          이곳은 어릴적 아이들과 틈나는대로 산책 나왔던 곳이어서 익숙한 곳이다. 

          딸아이는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어린 아이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춘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흔한 어리광 한번 부릴 기회 조차 없었던 아이의 숨겨진 아픔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해 졌다.

          그래도 참 잘했다. 잘 참아 주었다.

          딸아! 우리 늘 기억하자. 함께 춤추고 행복해 했던 오늘 이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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