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 백스테이지 풍경
철퍼덕 주저앉아 땀 닦고 마사지 받고… 바나나 두 박스 해치워

'백조들'은 무대 밖으로 나오자마자 철퍼덕 주저앉았다. 오래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데 5~6m 밖에서도 거친 호흡이 들렸다. '왕자' 김현웅은 키친타월을 뽑아 땀범벅이 된 이마에 붙였다. 백조와 사람 사이를 왕복해야 하는 탓에 분장실은 분주했고, 마사지를 받는 무용수들도 있었다. 분장실 출입구 옆에 놓였던 바나나 두 박스(130개)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국립발레단의 발레 《백조의 호수》가 공연 중일 때 백스테이지(backstage)에는 이런 진풍경이 숨어 있었다. 우아한 백조의 수면 아래 발길질 같았다.

발레《백조의 호수》는 이렇게 우아하지만 무대 뒤는 분주하고 무질서했다. 국립발레단 관계자는“무대가 판타지라면 백스테이지는 현실”이라고 했다./연합뉴스

무대 좌우에는 5개의 등·퇴장로가 있었다. 발레리나들은 토슈즈 끝과 바닥에 송진을 바르고 무대로 올라갔다. 소품용 탁자 위에는 지팡이·칼·목걸이와 함께 키친타월이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티슈에는 발광 물질이 첨가돼 있어 발레 무용수들은 키친타월로 땀을 닦는다. 공연 직전 분장실에서 한 발레리나는 발등에 '뽕'을 넣고 있었다. 다리 라인을 살리기 위해서다. 큰 거울 앞에 선 발레리노 김현웅은 "《백조의 호수》는 왕자 역이 너무 힘들어서 발레단에서는 '왕자의 호수'라고 부른다"며 씩 웃었다. "공연 1분 전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무용수들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됐고 붉은 무대막이 좌우로 열렸다. 성년이 된 지그프리트 왕자의 생일 장면이 펼쳐졌다. 무용수들은 백스테이지에서 소곤소곤 말을 했지만 무대에는 '몸의 언어'만 존재했다. 광대(윤전일)가 36바퀴를 돌자 백스테이지 안에서도 박수가 터져나왔다.

《백조의 호수》는 마법에 걸려 밤에만 사람으로 변하는 백조 오데트와 지그프리트 왕자의 사랑 이야기다. 1막1장에 등장하는 발레리나 대부분은 1막2장에서 백조로 변신하기 때문에 마음이 바빴다. 24마리 백조들은 송진을 바르고 몸을 풀며 줄을 섰다. 푸른 조명 아래 백조들이 등장해 이른바 '백조 라인'을 보여줬다.

인터미션(중간 휴식) 때 분장실은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을 고치느라 분주했다. 포도당을 마시는 발레리노, 토슈즈를 바꿔 신는 발레리나도 있었다. 주역은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분장실을 혼자 쓰지만 군무진(群舞陣·코르 드 발레)은 6인실, 7인실로 들어갔다. 토슈즈 끝에 접착제를 바르던 9년차 정혜란씨는 "'백조'는 팔과 등에도 분칠을 한다. 클래식 발레 중에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1년차 신승원씨는 "근육이 굳어지기 때문에 잠깐 쉴 때도 조끼나 바지를 껴입어 보온을 해야 한다"고 했다.

2막이 시작됐고 흑조(오딜)가 된 김지영과 왕자의 그랑 파드되(남녀 솔로와 2인무의 조합)가 펼쳐졌다. 김지영은 금방 백조(오데트)로 변신하며 춤을 췄다. 잠깐씩 퇴장할 때는 물을 마셨고 헤어스프레이로 머리를 다듬었다. 140분간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막이 닫히자 절뚝거리며 걸어나오는 발레리나도 있었다. 무대로 뛰어올라온 최태지 단장이 말했다. "10분만 쉬고 2막2장 다듬자. 정신들 차려!"

▶공연은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02)580-1300

출처 : 꿈같은 내 인생
글쓴이 : 하늘땅그리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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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무용수의 성공사례담 이긴 하지만,

그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올라 느끼는 감흥이나 장래의 희망을 얘기하는 부분에서,

               우리들에게도 공감을 주는 부분이 있어서 여기 옮겨봅니다.


 

      "못난 발"이 흘린 가장 아름다운 눈물 
   -강수진 서울서 ‘발레 20년’ 감사모임-


22일 밤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강수진 발레 20년 감사모임’에서

주인공은 너무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을 가진 그녀”라는 사회자(아나운서 이금희)
소개로 걸어나올 때부터 발레리나는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이날 입국한 강수진(40)은

“또 펑펑 울지 모르니까 미리 양해 구할게요”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곤 종이를 꺼냈다.

비행기 안에서 썼다는 감사 편지였다.

“…올해는 기쁜 일이 많았어요.

3월엔 ‘캄머탠처린(Kammertanzerin·궁중무용수)’
을 인증받았고, 7월엔 발레단 동료들이 제 입단 20주년 헌정 무대를 만들어줬고….
과분한 것들입니다.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지나간 세월과 여러 일들이 스쳐갑니다….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자 박수가 나온다) 엄마, 아빠 그리고 소중한 분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발레만 생각하고, 사랑한 시간이었습니다.

(길게 심호흡) 어디서 일하든 여러분들을 잊지 않겠…(다시 울음).”

말이 여러 번 끊겼지만 다 들리는 것 같았다.

강수진은 함께 입국한 남편 툰치 소크맨(터키인)에게

“Happy Birthday(생일 축하해)!”라고 말한 뒤 무대를 내려왔다.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

1980년 어머니의 권유로 발레를 시작한 그는 1982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입학
했고 1985년 스위스 로잔 발레콩쿠르에서 우승(동양인 최초)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 직후 발목을 다쳤다.
1년이 다 가도록 솔로는커녕 군무(群舞)에도 끼기 어려웠다. “극장 옥상에 올라갔
다가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떤 적도 있었다”고 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연습을 택했다.

매일 15시간 이상 땀을 흘릴 땐 하루에

토슈즈를 네 켤레(보통 2주일치 소비량)나 써서

물품 담당자로부터 “아껴 써달라”는 주의(?)를 듣기도 했다.

옹이처럼 튀어나온 뼈, 뭉개진 발톱, 굳은 살과 상처
들…. ‘세상에서 가장 못난 발(240㎜)’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녀의 발 사진에 감동하고, 삶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1993년 1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든 발레리나가 꿈꾸는 주역을 맡았다. 지난
7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그에게 헌정한 작품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발레리나로는 환갑이라는 마흔 살이 됐지만

강수진은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을 정도로 체력은 문제없다.

발레단 동료들은 20주년 축하 파티에서 ‘앞으로 20년 더 해야지’ 하더라”며 웃었다.

이날 감사모임은 강수진의 오랜 후원자인

이세웅 서울사이버대학교 이사장이 마련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김용배 전 예술의전당 사장, 박인자 국립발레단장 등 무용
계 인사들이 150명 가량 참석했고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Slan Abhaile -safe home- [음성:Kate Purcell ]

    

출처 : 장미의 나날
글쓴이 : 산수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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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처럼 어깻짓하기, 일본 사람처럼 걷기, 중국 사람처럼 미소 짓고 태국 사람처럼 손짓하기, 몽골 사람처럼 뒤돌아보기…. 무용가 백향주(32세)의 몸 안에서 동아시아의 몸짓과 표정과 정신이 충돌하고 조화하고 꽃을 피운다. 관음보살춤, 초립동, 무당춤 등을 완벽하게 재현해 ‘최승희 춤’의 마지막 계승자로 주목받았지만, 그는 스승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최승희는 그때, 저는 지금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로 하여금 삶의 반려자로 무용, 그것도 동아시아 무용을 선택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집안의 부모자식, 형제자매의 국적이 다 제각각이지요.” 그의 부모님은 조총련계 재일한국인 2세였다. 그는 재일한국인 3세로 태어났고, 한국 국적을 택했다. 역사, 민족, 국가의 문제는 그에게 3인칭이 아닌 1인칭,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한국춤도 아니고 일본춤도 아니고, 대체 어느 나라 춤이냐고 따지는 이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제 춤이지요.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소통하게 하는 것, 다양한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언젠가 그의 손금을 본 이가 ‘굴곡 많은 인생’을 예언한 적이 있다. 예언처럼 유독 많은 위기와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중 세 번의 전환점은 그를 더 높고 먼 곳에 다다르게 했다.



세 번의 황홀한 성장통

 “열다섯 살에 북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아마추어에서 전문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거지요. 그때 전문가의 세계란 것에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2만 명이 참가하는 콩쿠르란 게 상상이 가나요? 수개월에 걸쳐 심사가 진행되고 끝없는 경합이 벌어지지요. 문자 그대로 배틀이에요. 사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나이였죠. 하지만 그때 강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엔 한민족의 대표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결심도 대단했지요. 덕분에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따고 외국인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 최연소 입학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는 열아홉 살에 솔로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두 시간여 동안 한 사람이 여러 얼굴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독무는 이십대 후반에야 선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독무 공연 준비를 북한에서 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양아들인 김해춘 선생님께 배웠지요. 난 우리 선생님이 사람인가 귀신인가 했습니다. 연습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혀를 깨물고 하라!’ 그러시더군요. 말씀대로 혀를 꽉 깨물고 했더니 너무 아파서 정말 쓰러지지는 않게 되더군요. 그때 저는 아, 명성이란 게 이런 거구나,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노력을 쏟아부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혹독한 훈련 덕분에 그 후 10년을 쉽게 넘어갈 수 있었지요.”

인연이 다하고 태어나는 곳

 인생의 세 번째 전환점은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찾아왔다. 1998년 그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무용가로서 민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공연을 가졌다. “누가 부모 인생을 망치면서까지 감히 공연을 고집하겠습니까. 제가 한국 무대에 선다는 것은 부모님이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모두 잃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타국에서 우리말, 글을 지키고자 30년간 노력하셨지만 한순간에 딸을 잘못 가르친 사람이 되고 말았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2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다정다감한 ‘변종 경상도 싸나이’ 이용권 씨(39세)와 사랑에 빠져 한국에서 가정을 꾸린 그는 예쁜 딸도 낳았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의 무용가로서 홀로서기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 30년간의 준비를 맺음한 곳이자, 더 넓은 세계로 발돋움하는 새 출발의 거점인 셈이다. 독립을 위한 무대로 그는 비보이브레이크 댄스팀와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과 제가 가진 서로 다른 ‘코드’가 소통한다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라 기대해요. 함께 연습하며 춤의 새로운 재미를 새삼 발견하고 있어요.”



 아시아인 백향주는 그의 스승들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에게 냉정한 충고를 건넨다. “한민족은 머리가 아주 비상합니다. 한국춤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추기 어려운 춤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현실은 왜 그런지 침체되어 있지요? 저는 그 이유가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야든 공유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따라야 발전한다고 봅니다. 물론 좋은 부분만 이것저것 떼어와서 새로운 걸 조합해내는 건 결코 공유가 아니지요. 상대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배우고자 할 때 진정한 공유가 이루어지는 거지요. 더군다나 예술에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나요? 예술가가 혼자 살고자 하면 다 죽이게 돼요. 그럼 결국 예술가도 죽게 되겠죠.”


 


(감동) 욕심만 많았습니다




누구의 발인지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닙니다.

사람의 발을 닮은 나무뿌리도 아니고

사람들 놀래켜 주자고 조작한 엽기사진 따위도 아닙니다.

예수의 고행을 좇아나선 순례자의 발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명실공히 세계 발레계의 탑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노라 하는 발레리나들이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하는,

강수진 말입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답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툭툭 떨굴 뻔 하였지요.

감동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이지요.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

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

저를 들여다 봅니다.

너는 무엇을.. 대체 얼마나... 했느냐...

그녀의 발이 저를 나무랍니다.

인정합니다..

엄살만 심했습니다..

욕심만 많았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 고은님 작가의 글 중에서..

 

2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무용올림픽에서 한국 발레가 금, 은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서울예고 2학년에 재학중인 한나래양과 1학년인 문채린양이 클래식-네오클래식(16~18세 참가) 학생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또 서울예고 1학년에 재학중인 예성훈군이 은상을 수상했다.

19~21세가 참가하는 클래식-네오클래식 학생부문에서는 성균관대 1학년 이서희양과 2학년에 재학중인 김수민양이 각각 금상과 은상을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다.

 

“무리한 연습으로 몸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로 출국했는데, 좋은 성적을 거두어 매우 기쁩니다. 서희는 타고난 체격에 용모가 빼어나 발레리나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어요. 점프와 회전 등 다양한 동작을 잘 소화하고 나이에 비해 표현력이 성숙한 것이 장점입니다. 수민이는 키는 작지만 서구형 체격을 지녔고, 연기력과 감성이 뛰어나죠”

 

제자들이 금, 은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에 성균관대 김경희 교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베를린무용올림픽은 2004년 창설된 국제무용대회로 매년 20여개국에서 약 600여명에 달하는 무용수들이 참가한다. 올해 이 대회 심사위원장은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출신으로 세계적명성을 얻고 있는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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