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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맞아 오래 전부터 찾고 싶었던 서산 해미에 있는  해미성지를 찾았다.

이 곳은 백년동안 무려 3천명이나 되는 천주교신자를 참혹하게 처형하였던 곳이다.

대전-당진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니 겨우 시간 반 남짓 소요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처소를 둔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중지 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 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 하였으며,

1819(을해) 년과 1827(정해)년 기간동안에는 손여옥 등 1870년대에 까지

수십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야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넓직한 돌을 놓은 노천예배당이 있다.

마리아는 이곳에 앉아 기도하며 눈물을 흘린다.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졌던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 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이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라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 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는냐고 ,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합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 같이 하늘에 외쳐대는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 "라는간구 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머리 "라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 이라 부르고  있다. 


 

 1790년대 부터 80여 년간 시산혈하를 이루던 서문밖 사형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 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수 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 죄인들을

 외나무 다리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 죄인둠벙 " 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다.

 

 

 

 

 

 

 

 

 바로 이 곳이 신자들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행해졌던 돌다리이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말씀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그 당시 참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던 교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기념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부조물, 신자들이 묶인채 끌려가는 모습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육체적 고통을 잘 극복하도록 빌어 주소서.

 

병인박해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신부가 생매장지 일주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앙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세상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천주님 곁으로 떠나가신 분들을 위한 진심 어린 기도를 올려서 일까? 

 마리아의 표정이 너무 편해 보인다.  


저를 구원하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두려운 어둠으로부터
저를 데려가시어
폭풍이 다가올 때에
끝없는 어둠으로부터
저의 닫힌 시야로부터
빛의 하늘로
저를 자유롭게
구원하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해치려는 이들로부터
고요한 바다위에
끝없는 어둠으로부터
저의 닫힌 시야로부터
빛의 하늘로
저를 자유롭게
날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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