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엔 역사가 있다(2013.7.28)
2013년 1월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이전을 마쳤다.
대전시가 광역시로 승급하면서 충남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이후에도 충남도청은 오랫동안 대전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주시로부터 충남도청이 이전한 1932년 10월 이래 80년만의 일이다.
당시 도청을 뺏긴 공주시민들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대 사건이었고, 교통의 요지로서 신흥도시로의 꿈을 꾸던 대전으로서는 일대 도약의 계기가 된 큰 사건이었다.
당시 대전에는 경부선 철도부설과 관련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땅투기의 귀재였던 공주 갑부 김갑순의 역할도 컸을 것이다. 또한 이 곳이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란 점에서 일제는 침략과 수탈을 위한 새로운 도청소재지의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그 역사의 뒤안길에 서 있는 도청 이전을 계기로 옛도청(현 시민대학)을 둘러 보기로 하였다.
이 곳을 가보기로 작정한 데에는 건물에 남아 있을 식민지의 잔재를 찾아보고, 이곳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본래 2층 건물이었지만 1960년에 3층(유리창이 많은 부분)으로 증축되었다.
건축물도 오래 남아 있으면 역사가 된다.
6.25동란으로 대전에 있는 거의 모든 크고 작은 건물들이 파괴된 상황에서도 도청 건물은 건재 했다.
전쟁 중엔 잠시 이승만대통령이 내려와 임시정부청사가 되기도 했지만, 곧 북괴군에 점령되어 인민군 총사령부 건물로 이용되었다.
당시 미군의 엄청난 폭격에도 이 건물이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민군들이 도청 옥상에 수십명의 미군포로들을 포박하여 방패막이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공주에 있던 도청청사(현 공주사대부고 자리)
대전도청 상량식 장면
1933년 도청이전 직후의 모습
1층과 2층 벽 사이에 붙어 있는 문양.
조선총독부의 문장인 오동잎 문양이라는 설과 단순한 문양이라는 설이 있어 1991년 일부 철거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곳곳에 남긴 문양이 과연 별 생각없이 만들어 낸 의미없는 문양일까 라는 의구심을 씻어 버릴 수 없다.
그들이 저지른 온갖 민족말살정책을 생각해 보면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할 문제이다. 찝찝하면 아예 없애면 될 것을.....
중앙현관의 타일에도 비슷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멋지고, 튼튼한 건축물을 짓는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었고, 실제로도 무척 튼튼했던것 같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잘 표현되었듯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양식 회랑형태이다.
거울 속의 여인
천장에도 어김없이 문양이 남아 있고....
요즘 건물에 비해 복도의 폭은 좁지만 중간 중간에 설치된 아치형 골조는 꽤 멋스럽다. 아마도 이오니아와 도리아 양식이 혼합된 듯 하다.
언제 나왔는지 시설 관리인이 친절하게 등을 켜준다.
80년 세월의 흔적은 퇴색한 건물의 외벽과 함께 녹이 쓴 철제 창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면 광장의 전경. 부속건물이 생각보다 많았고, 높이 솟은 하얀 굴뚝이 인상적이다.
도청에서 바라 본 중앙통(은행동)거리. 맞은 편의 대전역과의 거리는 약 1.5km이다.
대전의 근대사는 도청이전과 대전역에 얽힌 스토리를 알면 대체로 설명이 된다.
대전이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경부선이 개통되고 대전역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선 1905년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경부선 철도의 빠른 완공을 원했고, 반일감정이 가장 약했던 부강-대전-영동 노선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들리는 바로 대전역은 옛분위기가 가장 많이 남아 있어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었다던데....
아쉬운 점은 대전역사 내에 남아 있던 오래된 건축물들이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아내도 시내에 나온 김에 대전역에 5,6번 통로에 있던 추억의 가락국수를 맛보자며 채근을 한다.
대전역 광장. 대전부루스의 노랫말이 지나간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일제 때의 대전역 광장. 아래쪽에 기모노 입은 여인이 보인다.
대전역 광장은 20년 전만해도 대통령 선거유세 등 주요한 집회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예전의 분수대도 사라지고 넓직했던 광장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다.
역사 뒷편에는 많은 차량이 주차를 할 수 있는 대형광장(동광장)이 만들어졌다.
대전역의 옛모습.
1901년 기공식을 갖고 1905년 1월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며 경부선 개통식과 동시에 완성되었다.
1910년 1월에는 순종황제를 앞세운 이토히로부미가 이곳에 들른 바 있다.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순종황제를 꼭두각시처럼 앞세워 지방순회를 다녔고,
플랫폼에 모여든 전직고관과 유지들은 권위에 눌려 힘이빠져버린 순종의 모습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때 이토히로부미는 대전에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음을 알고 회덕면 태전리라는 지명을 일본식 지명인 대전으로 고치게 하였다 하여
10여년전 증산도에서 대전의 옛이름인 태전을 되찾아야 한다는 서명운동을 벌인 적도 있으나
이미 조선시대 때부터 대전면, 대전읍, 대전부 등으로 불리워 진 바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전쟁 중 파괴된 대전역
워커중장과 24사단장이었던 딘 소장.
워커중장으로부터 대전을 사수명령을 받고 처음 대전에 도착한 딘소장은 7월 21일까지 대전을 방어하던 중 적군의 포로가 되었고,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 33명과 기관사 3명이 미카129열차를 이끌고
대전으로 들어왔지만 특공대원 1명과 기관사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사하였다.
당시 김재현 기관사는 8발의 총알을 맞고 숨지는 순간까지도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3년간 파란만장한 포로생활을 겪은 딘소장은 1953년 9월 포로교환 1순위로 귀환하였으며, 일계급 특진하여 6군사령관으로 복무하다 1955년 예편하였다.
당시 미 24사단은 병력 1만6,000명 중 8,660명만이 살아남아 거의 와해되었다고 한다.
딘소장 구출작전에 투입되었던 미카3 129열차.
1940년에 제작된 증기기관차로 1970년까지 30년간 운행되다가 디젤기관차의 등장으로 퇴역하였다.
앞으로 등장하게 될 무궁화열차
미국 정부는 고 김재현 기관사에게 미국방성 민간인특별봉사상을 수여했다.
여름휴가철이라서 그런지 대합실은 많은 이용객들로 붐빈다. 괜시리 기차여행이 하고 싶어 진다.
예전엔 5,6번 통로에서 2~3분안에 흡입하듯 먹어야 했던 가락국수. 지금은 1층 대합실 음식점의 한코너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철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시간을 다투듯 먹어야 했던 가락국수맛을 재현할 수는 없을 듯 하다.
가락국수를 먹으며 내다 보는 창 밖의 모습이 제법 낭만적이다.
기차는 덩치 큰 야생동물
대전의 새로운 명물인 된 한국철도공사 쌍둥이 빌딩
374